- 노에미 메를랑의 이 그려낸 여성적 반격의 미학
<사진자료=발코니의 여자들 공식 포스터>
발코니라는 무대, 응시에서 행동으로
영화의 첫 장면은 의도적으로 히치콕의 <이창>을 소환한다. 카메라가 마주보이는 아파트의 창과 발코니를 유영하듯 훑어가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포착한다. 그러던중 죽어 있는 듯한 여자에게 카메라는 멈춘다. 곧 그녀를 깨우는 폭력적인 남편, 그리고 그 남편을 살해하는 여자의 모습이 펼쳐진다. 이는 단순한 오마주를 넘어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를 압축하여 보여준다. 맞다. 이 장면이 프롤로그이다.
노에미 메를랑 감독은 이 발코니라는 공간을 통해 흥미로운 은유를 구축한다. 발코니는 집 안과 밖 사이의 경계적 공간이며,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만나는 지점이다. 여기서 세 여성 - 엘리즈, 루비, 니콜 - 은 남성들의 시선에 노출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관찰하는 위치에 선다. 이는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서사에서 여성이 차지하던 수동적 위치를 능동적 관찰자와 행위자의 자리로 전환시키는 공간적 메타포로 작동한다.
알모도바르에서 메를랑으로, 여성 연대 서사의 진화
<발코니의 여자들>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귀향>(2001)과의 비교는 필연적이다. 두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출발점을 갖는다. 남성의 폭력에 대한 여성의 '사후 처리'로서 시작되는 서사, 시체 은닉과 여성 연대라는 공통분모. 하지만 그 지향점에서 두 작품은 결정적으로 갈린다.
알모도바르의 <귀향>이 보여주는 여성의 자유는 '생존과 치유'의 차원이었다. 그의 여성들은 닥쳐온 비극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조용히, 그리고 강인하게 감당해낸다. 그들은 남성 중심의 세계를 바꾸려 들지 않는다. 대신 그 세계로부터 자신과 딸, 자매, 어머니를 지켜내는 견고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이들의 자유는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남는 강인한 생명력 그 자체였다.
반면 노에미 메를랑의 <발코니의 여자들>은 생존을 넘어 적극적인 반격과 전복을 외친다. 노에미 메를랑 감독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현실에서 도망쳐 여성들만의 공동체가 되었던 친구집에서 치유를 얻었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그 치유의 에너지를 바깥세상을 향한 '펑크적인 풍자극'으로 폭발시킨다. 이 영화에서 자유는 더 이상 고상하거나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여자들끼리 있을 때 방귀를 뀌고, 셀룰라이트를 드러내며, ‘건강한 천박함’을 누리는 것이다.
<사진자료=예고편 영상 스틸컷>
색채와 시체, 그리고 해방의 미학
미학적으로도 두 영화는 강렬한 원색, 특히 '레드'를 활용한 멜로 드라마적 정서를 공유한다. 알모도바르가 피와 정열, 비밀을 상징하는 색으로 화면을 지배했다면, 메를랑은 마릴린 먼로의 레드 드레스와 붉은 립스틱을 통해 남성적 판타지로서의 여성성을 제시한 뒤, 이를 가차없이 전복시키는 장치로 활용한다.
엘리즈가 마릴린 먼로 복장으로 등장하는 순간은 이 영화의 핵심을 응축한다. 남성의 욕망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절대적 여성 이미지. 하지만 이 마릴린이 친구들과 함께 있는 편안한 공간에서 점차 자신을 억누르던 '절대적인 아이콘'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해방시켜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이 영화가 지향하는 해방의 본질이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문제가 있는 남성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남성의 유해함을 적극적으로 폭로한다.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엘리즈(노에미 메를랑)는 남편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하고 집으로부터 뛰쳐나온다. 돌아오라는 남편의 외침에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항거한다. 그리고 남편에게 성폭행 당했던 그 옷차림 그대로 그리고 맨 가슴을 드러낸 채 세상을 향해 걷는다. 그런 그녀에게 말 거는 시덥지 않는 남자에게 꽥- 소리치며 저항하는 것이 <발코니의 여자들>의 방식이다. 감독은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변명을 위한 '착한 남자' 캐릭터를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억압적인 세계를 악몽처럼 극단적으로 그려낸다.
이 장면은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말레나>(2001)의 그 유명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비슷한 장면 같지만 전혀 다른 메시지로 표현된다. <말레나>에서는 말레나를 가장 잔인하게 짓밟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마을의 다른 여성들이었다. 그 여성들은 연대하지도 않으며 질투심에 눈먼 여성들의 집단폭력이 여성들이 서로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정치적 올바름보다는 여성들의 체감하는 현실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선택을 했다.
<사진자료=예고편 영상 스틸컷>
트라우마의 시각화와 유령의 정치학
흥미로운 지점은 '트라우마'의 시각화다. 죽은 남자가 유령으로 계속 나타나 피해자를 괴롭히는 판타지적 설정은, 가해 행위가 끝난 후에도 피해자의 삶을 계속해서 잠식하는 트라우마의 본질을 탐구하는 영화적 장치로 사용된다. 결국 영화는 이 유령(트라우마)이 스스로 가해 사실을 인정하게 만듦으로써 피해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공통의 경험을 한 여성들에게 이 카타르시스를 주고 싶었었던 것이다.
또한 영상으로는 성폭력 피해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이 피해자의 말을 믿게 만들고, 동시에 부부 강간처럼 논쟁적인 폭력은 제대로 카메라에 담아내는 메를랑 감독의 단호한 연출 과 철학방식과 맞물린다. 그녀는 단순히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선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여성의 시선으로 남성 중심의 서사 문법과 폭력의 재현 방식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미투 시대의 목소리에서 발코니 혁명으로.
노에미 메를랑과 셀린 시아마의 만남은 이런 맥락에서 더욱 의미 깊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배우와 감독으로 만났던 두 사람이 이번에는 감독과 각본가로 손을 잡고,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려내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한다. 시아마가 구축한 여성 중심 서사의 미학적 토대 위에서, 노에미 메를랑은 한 발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한 공격적인 목소리를 내뱉는다.
결론적으로, <발코니의 여자들>은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닦아놓은 여성 연대 서사의 미학적 토대 위에서, 미투(#MeToo) 시대를 통과한 세대의 급진적이고 대담한 목소리를 담아냈다. <귀향>의 여성들이 억압적 현실 속에서 서로를 지키는 '귀향'의 연대를 보여줬다면, <발코니의 여자들>은 그 현실 자체에 균열을 내고 조롱하며 새로운 규칙을 쓰려는 '발코니' 위의 혁명을 보여준다. 이는 여성의 자유에 대한 영화적 담론이 '내적 생존'에서 '외적 해방'으로 나아가는 의미 있는 진화이며, 이 영화가 단순한 장르적 쾌감을 넘어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