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6-12(금)
 
  • “세기말의 껍질만 쓴, 연민 없는 질주” – 복제된 홍콩 느와르, 사라진 인간의 무게와 여성 서사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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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자료=프로젝트Y 포스터>

 

 

 

 

영화<프로젝트 Y>가 잃어버린 '인간의 무게’

 

 

영화 <프로젝트 Y>의 오프닝과 엔딩씬은 지하보도에서 걷는 미선(한소희)과 도경(전종서)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영화전체의 톤이 무엇인지, 지향하는 스타일은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90년대 홍콩영화의 그것이었다. 

서울의 밤 지하보도의 인공광과 레드, 블랙의 강렬한 대비를 시킨 이 장면을 가장 힘주어 찍은 이환 감독은 <영웅본색>, <천장지구>처럼 홍콩 영화 르네상스 시기의 색감과 빛을 구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왜 이 영화는 90년대 홍콩 영화의 색감과 미장센을 구현하고 싶었을까?

그것은 이 영화가 세기말적인 청춘의 방황과 갈등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왕가위 감독으로 대변되는 90년대 홍콩영화를 들여다보면 번잡한 도시 속 청춘들의 방황, 화려한 네온사인 속에 청춘의 고독을 담아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군가의 마음(사랑)을 갈구했고,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을 먹으며 사라져가는 시간과 인간성을 붙잡으려 몸부림쳤다. 

90년대엔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기 때문에 그들이 누리던 모든 것들이 사라질 거라는 세기말적 두려움과 불안감이 팽배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6년에 그 홍콩영화의 변주곡을 자처한 <프로젝트Y>에는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대신 유통기한 없는 금괴를 위해 자신의 삶을 팔아치운다. 여기에선 그 찬란한 슬픔도, 청춘의 무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황금의 욕망을 향한 맹목적인 질주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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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자료=프로젝트Y 스틸컷>

 

세기말적 미학의 오용

이 영화는 90년대 홍콩영화의 색감과 미장센을 복제하고자 하지만 그 색채 아래 담긴 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파괴되어가는 인간성의 전시였다.

영화는 ‘우연히 알게 된 정보로 유흥가의 실세 토사장의 은닉자금을 훔치려던 미선과 도경이 돌이킬 수 없는 수렁을 향해 질주’하는 서사를 담고 있다. 

문제는 이 ‘질주’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이다. 폭력과 피로 가득한 이 영화는 어떠한 것으로 승화되지 못한 채 관객은 그들의 폭력을 관조하며 소리와 촉각의 자극을 탐닉하게 만든다. 이는 ‘탐미주의’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미적 빈곤이자 스타일의 과잉이 낳은 불쾌한 결과물이다.

 

거세된 저항과 매몰된 연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2007년작 <데쓰 프루프(Death Proof)>는 여성들이 남성 살인마(가해자)를 응징하며 얻는 전복적인 쾌감을 주는 동시에 ‘복수’와 ‘해방’이라는 여성서사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프로젝트 Y>는 물질적 몰락에서 헤어 나오고자 인간성을 거세하는 퇴행을 보여준다.

 

낮에는 꽃집 주인으로, 밤에는 유흥가의 에이스로 "악착같이 돈을 모"으던 미선과 도경은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는다. 그들이 저항해야 할 대상은 명확하다. 토사장으로 대변되는 자본권력과 그들을 착취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저항을 7억원의 현금보따리와 금괴상자의 탈취라는 또다른 범죄로만 치환한다. 저항의 대상은 명확하지 않다. 저항의 방식은 오직 폭력과 누가 물질을 가로챘것인가의 서사에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것은 허무뿐이다. 

이렇듯 문학과 영화가 쌓아올린 ‘여성의 연대와 저항’마저 자본의 논리와 세기말적 무력감에 매몰되었다는 점이 안타깝다.

 

“엄마가 죽었어. 엄마가 죽었다고!”라며 도경(전종서)에게 원망하듯 외치는 미선(한소희)에게 도경은 ‘너도 엄마가 죽기를 바랬잖아’라고 받아친다. 엄마(김신록) 역시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살아가지만 도경과 미선이 가져온 황금을 보고 기회를 다시 잡으려는 추한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비춰진다.

 

Y세대인 도경에겐 '엄마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슬퍼하고 동정하는 것은 잠시이고 당연한 폐기로 받아들인다. 과거(역사)에 대한 부채 의식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생존'이라는 본능만 남는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영혼을 잃어버리고 본능적 욕망만이 존재하는 좀비 공동체에 불과했다.

자신을 구해준 엄마(김신록)은 도경에게 두 손으로 얼굴을 붙잡고 말하는 장면에서 이 모든 것이 잘 설명된다.

“물러 터졌어. 우리 도경이. 너 꼴리는 대로 살아. 너 꼴리는 대로 살라고!”

 

감독은 "차에 한 번 올라타면 끝까지 달려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 것처럼, 영화는 멈추지 않는 질주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질주의 끝에 무엇이 있는가? 미래와 희망이 거세된 채 금괴라는 물질적 가치를 쫓다 그 세계를 떠나버리는 결말은, 탈출이라기보다 열패감 끝에 시스템에 투항한 현실 순응자의 뒷모습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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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자료=프로젝트Y 스틸컷> 

 

복제되지 못한 ‘인간의 무게’

'사람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고 하는 감독의 말과는 달리,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을 위해 기능적으로 움직이는 장치처럼 보인다. 미선과 도경의 선택은 예측 가능하고, 그들의 행동은 플롯을 진행시키기 위한 장치에 그친다. 평범한 일상을 꿈꾸던 그들이 범죄의 세계로 뛰어드는 과정에서 내적 갈등이나 도덕적 고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90년대 홍콩 영화가 '파멸' 앞에서도 인연의 찰나와 고독의 무게를 긍정했다면, <프로젝트 Y>는 그 자리에 냉소와 생존 본능만을 채워 넣었다.

한소희와 전종서라는 아이코닉한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겪는 고통은 관객에게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비극의 전시'로 휘발된다. 90년대 홍콩 느와르의 스타일은 복제했을지언정, 그 스타일이 지탱해야 할 '인간에 대한 연민' 그 무게감까지는 담아내지 못한 셈이다.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디스토피아는 예술적 통찰이 아니라 냉소적 상업주의 산물로 전락하기 쉽다. 이 영화가 남긴 ‘불쾌한 허무’는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상업주의적 포장의 한계

이 영화는 제작 단계부터 최근 극장에서 보기 드문 여성 투톱영화로 화제를 모았다. 토론토국제영화제 특별 프레젠테이션 섹션초청, 이환감독의 전작 <박화영>이 영화제에서 쌓아올린 명성에 한소희 전종서라는 대중적 스타파워를 결합한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마케팅 전략이 오히려 작품의 본질을 가리거나 작품의 방향성마저 흐트러 놓은 것은 아닐까. 여성 주인공에 장르물을 붙이면 여성서사의 완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라도 하는 것일까.

여성 서사가 단순히 '여성이 주인공인 범죄물'을 넘어 시대의 울림이 되려면, 총구와 차가운 네온사인 너머에 있는 '억압된 인간, 차별받는 인간에 대한 무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독자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해졌다.

독자들은 이 영화를 '희망이 거세된 시대의 자화상'으로 읽을까? 이 영화가 주는 불쾌함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 존엄'의 가치를 환기할까? 제작진이 의도한 '좋은 배신감'이 과연 관객에게 긍정적인 카타르시스를 줄 것인지, 아니면 그저 공허한 냉소만을 남기는지는 관객 각자의 몫이 될 것이다.

 

냉소와 통찰은 한 끗 차이이다. 마치 윳놀이의 ‘도’와 ‘빽도’처럼 말이다. 단순히 세상은 망했고 희망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예술적 게으름에 가깝다. 이 지옥 같은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왜, 여전히 인간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계속 살아내야 하는가’에 스스로의 답을 찾아가게 해야 한다.

 

 

 

 

"미선과 도경은 세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지만, 정작 그들이 쏜 것은 자신들의 마지막 인간성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진곤 GN프로필.jpg

영화감독/칼럼니스트 김진곤 기자 gn_network@daum.net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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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칼럼] 영화가 잃어버린 '인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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