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5-0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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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gn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 제30편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단편영화 100인 100초 -제30편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단편영화는 일반 상업영화에 비해 저예산으로 제작되지만 작가들의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상영 시간이 짧아 바쁜 일상에서 잠깐 짬을 내어 즐길 수 있는 문화컨텐츠입니다. GN_network가 야심 차게 준비한 gn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많이 사랑해주시고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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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2024-01-22
  • [영화]gn_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 제29편 0.5를 위한 비트
    [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단편영화 100인 100초 -제29편 0.5를 위한 비트 단편영화는 일반 상업영화에 비해 저예산으로 제작되지만 작가들의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상영 시간이 짧아 바쁜 일상에서 잠깐 짬을 내어 즐길 수 있는 문화컨텐츠입니다. GN_network가 야심 차게 준비한 gn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많이 사랑해주시고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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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2
  • [영화]gn_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 제28편 2039대한연방
    [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단편영화 100인 100초 -제28편 2039대한연방 단편영화는 일반 상업영화에 비해 저예산으로 제작되지만 작가들의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상영 시간이 짧아 바쁜 일상에서 잠깐 짬을 내어 즐길 수 있는 문화컨텐츠입니다. GN_network가 야심 차게 준비한 gn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많이 사랑해주시고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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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1
  • [영화]gn_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 제27편 highlight
    [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단편영화 100인 100초 - 제27편 highlight 단편영화는 일반 상업영화에 비해 저예산으로 제작되지만 작가들의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상영 시간이 짧아 바쁜 일상에서 잠깐 짬을 내어 즐길 수 있는 문화컨텐츠입니다. GN_network가 야심 차게 준비한 gn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많이 사랑해주시고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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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5
  • [영화]gn_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 제26편 가변차선에 서서
    [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단편영화 100인 100초 - 제26편 가변차선에 서서 단편영화는 일반 상업영화에 비해 저예산으로 제작되지만 작가들의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상영 시간이 짧아 바쁜 일상에서 잠깐 짬을 내어 즐길 수 있는 문화컨텐츠입니다. GN_network가 야심 차게 준비한 gn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많이 사랑해주시고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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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8
  • [영화]gn_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 제25편 너의 자리
    [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단편영화 100인 100초 - 제25편 너의 자리 단편영화는 일반 상업영화에 비해 저예산으로 제작되지만 작가들의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상영 시간이 짧아 바쁜 일상에서 잠깐 짬을 내어 즐길 수 있는 문화컨텐츠입니다. GN_network가 야심 차게 준비한 gn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많이 사랑해주시고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문화/예술/스포츠
    2023-12-11
  • [포토] 여의도. 샛강 생태 공원
    [GN뉴스=경기도]청연= 여의도에 있는 샛강 수변 생태 공원은 한강 여의도 공원을 거쳐 8,2km로, 여의도 전체를 3시간 정도 걸으며 도심 속에 자연을 느껴 볼 수 있는 곳이다. 신길역에서 문화다리로 내려와 샛강 생태공원과 해오라기숲, 버들광장을 지나 한 때는 서울의 상징과도 같았던 63빌딩, LG 트윈 빌딩과 국회의사당을 만나 볼 수 있다. 유람선이 있는 한강공원 그리고 원효 마포 서강 대교 밑을 지나면 다시 신길역으로 이어지는 문화다리를 만난다. 문화다리로 나가지 않고 1km를 더 걸으면 여의교가 나오고 거기서 샛강역과 대방역으로 갈 수 있다.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은 부담없이 산책할 수 있는 도심속의 여유같은 공간이다.
    2023-12-03
  • [클래식]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17편 멘델스존
    [GN NEWS=경기도]이성아 기자=유튜브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여 17번째 시간입니다.지난시간에 이어 멘델스존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멘델스존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한 사람을 꼽으라면 그의 네 살 연상의 누나 파니 멘델스존을 꼽을 수 있습니다.파니는 멘델스존만큼이나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어린 시절 바흐의 프렐류드 24곡을 모두 외워 연주했고, 작곡에도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멘델스존의 집에선 남매가 함께 피아노 앞에 앉아 연탄곡을 치고, 주제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즉흥연주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이들 남매가 연주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감탄했다고 합니다. 멘델스존은 성인이 된 후에도 파니가 자신보다 음악적 재능이 훨씬 더 뛰어났다고 이야기했습니다.파니는 동생 멘델스존처럼 작곡가가 되길 원했습니다. 실제 그녀는 평생 250여 곡의 작품을 썼고,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도 활동을 했지만 아버지 에이브러햄은 파니가 음악가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동생 펠릭스에겐 음악이 직업이 될 수 있지만, 네겐 그저 장식품일 뿐이란다. 여성에게 음악은 그런 것이다”어느 날은 어린 멘델스존이 영국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다 파니가 쓴 곡을 연주한 적이 있었는데 이 연주를 들은 여왕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곡이 정말 아름답구나, 네가 만든 곡이니?”누나가 썼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혼이 날게 뻔했던 멘델스존은 집안의 성인 멘델스존을 언급하며 “멘델스존이 썼습니다”라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고 합니다.이들 남매의 우애는 각별했습니다.음악학자들은 둘의 관계를 우애 그 이상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멘델스존은 27세에 세실 장 르노라는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했는데 파니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사랑하는 동생을 다른 여인에게 떠나보내야 한다는 서운함과 질투심이 뒤섞여 도저히 감정이 정리되기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파니는 화가인 빌헬름 헨젤과 결혼했는데, 헨젤은 아내와 처남이 만날 때면 늘 묘한 소외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파니와 멘델스존은 늘 자신들만의 암호 같은 말로 대화했고, 때론 서로 언성을 높이곤 했는데, 말다툼이라기보단 연인의 사랑싸움 같았다고 하니 이들의 관계를 오해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파니는 41세에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첫 작품집을 출판했습니다.본격적으로 음악가로서의 삶을 살려던 차였지만 첫 출판 1년 뒤 그녀는 돌연 뇌졸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하루를 시작했고 합창곡 반주를 하던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인데 당시 연주 여행차 영국 런던에 머물던 멘델스존은 누나의 장례식이 다 끝난 후에야 바보를 전해 들었습니다. 멘델스존은 소식을 듣자마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후 극심한 불면증과 두통에 시달리다가 1년 뒤 누나처럼 뇌졸중으로 38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사망 직전 즈음 멘델스존은 망상에 시달리고 헛것을 보는가 하면 북을 치는 흉내를 내는 등 비참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멘델스존의 평생 친구이자 자신의 음악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었던 유일한 사람인 누나 파니 곁에 묻혔습니다.멘델스존은 낭만주의에 살았지만 그의 음악은 고전주의를 지향했습니다.그의 음악 스타일에 대한 영감은 이전 거장들의 스타일에 대한 그의 기술적인 숙달과 해석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는 확실히 베토벤과 베버의 음악에서 초기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진화하였습니다. 멘델스존은 자신의 음악적 유산을 새로운 형식과 스타일로 대체하거나 보다 이국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을 사용하는 것보다 자신의 음악적 유산을 되살리는데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바그너, 베를로오즈 및 프란츠 리스트와 같은 많은 초기 낭만주의 동시대 사람들과 크게 달랐습니다. 멘델스존은 리스트의 건반 기교에 감탄했지만 그의 음악에서는 공허함을 발견했습니다. 동시대 작곡가인 베를로오즈, 슈만, 리스트와 비교할 때 멘델스존 작품의 선율과 화성은 훨씬 단순하고 형식적으로도 선명하며 우아하고 섬세합니다. 그는 전통적인 틀에서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추구한 음악가였습니다.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17번째 소개해 드릴 작품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 번호 64번 1악장(Violin Concerto in E minor op. 64, 1Mvt)입니다. 1834년부터 1844년까지 무려 6년에 걸쳐 작곡한 그의 유일한 바일올린 협주곡입니다. 1845년 3월 13일 한 살 동생이자 친구이며 동료였던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드 다비드와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초연되었습니다. 초연부터 열광적인 호평을 받았으며 현재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세계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불리는 명작입니다. 작곡 당시 멘델스존은 머릿속을 계속 맴돌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했다는 선율을 제1 주제로 한 1악장이 가장 유명합니다. 일반적인 바이올린 협주곡처럼 빠르고-느리고-빠른 3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으나, 곡 시작과 함께 바로 독주 바이올린이 등장하는 점과 전곡이 쉬지 않고 악장 간에 쉼 없이 연주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행복한 음악가의 인생을 살았던 멘델스존 그의 생애처럼 거침없고 아름다운 그의 명곡을 함께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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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0
  • [영화]gn_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 제24편 0:00
    [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단편영화 100인 100초 - 제22편 거 지랄이네 단편영화는 일반 상업영화에 비해 저예산으로 제작되지만 작가들의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상영 시간이 짧아 바쁜 일상에서 잠깐 짬을 내어 즐길 수 있는 문화컨텐츠입니다. GN_network가 야심 차게 준비한 gn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많이 사랑해주시고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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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6
  • [영화]gn_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 제22편 거 지랄이네
    [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단편영화 100인 100초 - 제22편 거 지랄이네 단편영화는 일반 상업영화에 비해 저예산으로 제작되지만 작가들의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상영 시간이 짧아 바쁜 일상에서 잠깐 짬을 내어 즐길 수 있는 문화컨텐츠입니다. GN_network가 야심 차게 준비한 gnnetwork & 무비 트립(movie trip) / 단편영화 100인 100초 많이 사랑해주시고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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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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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평군, 청평면민 윷놀이 대회
    [GN뉴스=가평군] 이성아 기자 = 24일 가평군 청평면 청춘역 1979에서 2023년 계묘년 청평면민 윷놀이 대회가 열렸다. 새마을지도자남녀협의회가 주관하였고, 로타리클럽, 여울 상인회, 시민경찰대, 지사협, 체육회, 의소대, 이장연합회가 함께 하여 뜻깊은 자리를 만들었다. 지병록 청평면장의 축사를 시작으로 축하공연이 이어졌고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윷놀이가 신명나게 펼쳐졌다. 세탁기, 전자레인지, 압력밥솥, 쌀, 신라면 등 다양한 상품들이 추첨을 통해 지역민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행사도 이어졌다. 이 날 행사에는 서태원 가평군수, 최정용 의장, 최원중 의원, 이진옥 의원, 김종성 의원, 임광현 의원 등이 참가 하여 번호표를 뽑아 지역민에게 상품을 나눠주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만들어졌다. 또한 군과 군민이 경기도 체육대회 유치를 위한 열정과 기원을 하나로 모으는 시간도 가졌다. 청평면에서 처음으로 열린 윷놀이 대회가 지역민의 화합의 장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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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4
  •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10편
    [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유튜브 뉴스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열 번째 시간입니다.이번 시간에 소개해 드릴 작곡가는 이탈리아의 태생의 바로크 작곡가 토마소 조반니 알비노니(Tomaso Giovanni Albinoni)입니다.바로크 후기의 대표적인 이탈리아 작곡가인 그는 1671년 6월 8일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습니다.그의 아버지 안토니오 알비노니는 베네치아에서 종이 제조업과 판매업을 크게 하던 부유한 상인이었고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어 그는 물질적으로 매우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음악수업은 당시 저명한 베네치아의 작곡가 조반니 레그렌치(Giovanni Legrenzi)에게서 받았다고 전해지지만 확실치는 않다고 합니다. 알비노니는 초기에는 성악과 바이올린을 공부하면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지나 작곡에 더 전념을 하여 1694년 23세가 되던 해에는 자신의 첫 번째 오페라 제노비아, 팔미라의 여왕(Zenobia, regina de’ Palmireni)을 산 조반니의 파올로 극장에서 상연했으며, 이듬해에는 첫 번째 작품집인 12곡의 트리오 소나타(12 Sonate a tre)를 출판했고, 1700년과 그 이듬해에는 협주곡과 기악곡들을 잇달아 내놓게 됩니다.이 시기에 알비노니는 직업이라기보다는 즐거움을 찾는 대상으로 일종의 취미로 작곡을 하여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교회나 궁정음악가로 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1705년에는 13살 연하의 소프라노 가수 마르게리타 리몬디(Margherita Rimondi)와 결혼해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1721년 그녀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170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사업을 동생에게 물려준 후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의 채권자가 제기한 소송에 휘말려 가게들을 잃는 어려움도 겪게 됩니다. 또한 1718년부터 1722년까지 4년간 이탈리아 극장에서 자신의 오페라도 상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한 작품을 만들어 걸작들로 알려진 협주곡 집들을 잇달아 출판하였다고 합니다.1694년부터 1740년 사이에 50여 편의 오페라 작곡을 비롯하여 40곡이 넘는 칸타타와 다양한 편성으로 구성된 79개의 소나타, 59개의 협주곡, 8개의 교향곡을 포함한 폭넓은 기악곡을 작곡하는 등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특히 주목되는 것으로는 <신포니에 콘체르트, Sinfonie e Concerti>(작품 2, 1707)와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콘체르티, the concerti for solo violin>(작품 5, 1710), <독주 오보에와 2개의 오보에를 위한 콘체르티>(작품 7과 작품 9) 등이 있습니다. 1740년 이후 알비노니는 음악 활동을 완전히 접고 1751년 베네치아에서 당뇨병을 앓다 80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그는 같은 고향 출신인 비발디보다는 7살 많았고 바흐보다는 14살 많았습니다. 비발디와는 달리 음악을 직업으로 하진 않는 딜레탕트(dilettante 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취미 삼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작곡가로서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또한 충분히 훈련받은 음악가로 만토바 공작의 궁정 음악가라는 직업 음악가의 위치에 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오페라와 기악곡들로 폭넓은 인기를 누렸으며 세련되고 매혹적인 악풍이 독특한 작곡가 토마소 알비노니,다성음악 기법을 사용해 작곡한 그의 기악곡은 독창적인 리듬과 대담한 화성 등 혁신적인 작품을 많이 만들었습니다.그는 후기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기악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안토니오 비발디, 베네데토 마르첼로와 더불어 당대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도1740년 이후 알비노니는 음악 활동을 완전히 접고 1751년 베네치아에서 당뇨병을 앓다 80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같은 고향 출신인 비발디보다는 7살 많았고 바흐보다는 14살 많았습니다. 비발디와는 달리 음악을 직업으로 하진 않는 딜레탕트(dilettante 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취미 삼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작곡가로서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또한 충분히 훈련받은 음악가로 만토바 공작의 궁정 음악가라는 직업 음악가의 위치에 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오페라와 기악곡들로 폭넓은 인기를 누렸으며 세련되고 매혹적인 악풍이 독특한 작곡가 토마소 알비노니,다성음악 기법을 사용해 작곡한 그의 기악곡은 독창적인 리듬과 대담한 화성 등 혁신적인 작품을 많이 만들었습니다.그는 후기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기악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안토니오 비발디, 베네데토 마르첼로와 더불어 당대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도1740년 이후 알비노니는 음악 활동을 완전히 접고 1751년 베네치아에서 당뇨병을 앓다 80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그는 같은 고향 출신인 비발디보다는 7살 많았고 바흐보다는 14살 많았습니다. 비발디와는 달리 음악을 직업으로 하진 않는 딜레탕트(dilettante 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취미 삼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작곡가로서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또한 충분히 훈련받은 음악가로 만토바 공작의 궁정 음악가라는 직업 음악가의 위치에 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오페라와 기악곡들로 폭넓은 인기를 누렸으며 세련되고 매혹적인 악풍이 독특한 작곡가 토마소 알비노니,다성음악 기법을 사용해 작곡한 그의 기악곡은 독창적인 리듬과 대담한 화성 등 혁신적인 작품을 많이 만들었습니다.그는 후기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기악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안토니오 비발디, 베네데토 마르첼로와 더불어 당대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도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열 번째로 소개해드릴 작품은 토마소 조반니 알비노니(Tomaso Giovanni Albinoni)의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Adagio For Strings And Organ In G Minor>입니다. 토마소 알비노니의<아다지오>는 FM 클래시컬 뮤직 리퀘스트 베스트 10에 들어가는 명곡이기도 합니다. 이 곡은, 미국의 영화 감독 조지 오슨 웰스(George Orson Welles, 1915년 5월 6일 ~ 1985년 10월 10일)의영화 에 사용되면서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가 탄생하게 된 데에는 독특한 배경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독일 작센주의 드레스덴이 전쟁 말기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시가지가 완전히 파괴되는 바람에 작센 주립도서관에 소장된 희귀한 알비노니의 악보들도 많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1740년 이후 알비노니는 음악 활동을 완전히 접고 1751년 베네치아에서 당뇨병을 앓다 80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그는 같은 고향 출신인 비발디보다는 7살 많았고 바흐보다는 14살 많았습니다. 비발디와는 달리 음악을 직업으로 하진 않는 딜레탕트(dilettante 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취미 삼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작곡가로서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전쟁이 끝난 후 작센 주립 도서관(Saxon State Library)은 불타다 남은 알비노니 자필 악보 필사본 조각을 알비노니 연구로 유명한 로마의 음악학자 레모 지아조토(1910-1998Remo Giazotto)에게 보내어 감정을 의뢰했습니다. 이 악보 조각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몇 마디의 선율과 베이스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연구한 지아조토는 알비노니가 1708년경에 쓴 기악곡의 일부분이라고 결론짓게 되고 파편에 남은 선율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곡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 G단조>입니다. 비록 온전한 알비노니의 곡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오늘날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곡이 되었습니다.오르간은 저음부의 화음으로 곡에 화성적인 배경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처음에 저음부의 오르간 반주를 배경으로 현악기가 연주하는 짧은 서주가 나온 다음 이어 바이올린이 매우 애수 어린 선율로 흐르다 중간에 독주 바이올린이 감미로운 선율로 자유롭게 연주하고 이어 현악기와 오르간이 함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며 비장함의 극한으로 끌어올린 후 마지막 바이올린 솔로의 후주로 곡은 마무리됩니다. 알비노니의 곡을 한 곡만 소개해 드리려고 준비를 하였는데요 개인적으로 알비노니의 오보에 협주곡에 흠뻑 빠져 한 곡을 더 소개해 드리고 싶어 준비했습니다.알비노니의 오보에 협주곡 D단조 op.9 2번 알레그로(Oboe Concerto In D Minor, Op.9, No.2 – I Allegro)입니다.마르첼로 오보에 협주곡, 치마로사 오보에 협주곡과 함께 바로크 3대 오보에 협주곡으로 손꼽히는 대표적인 오보에 협주곡입니다. 특이하게도 알비노니의 작품 중에는 오보에를 위한 작품이 16곡이나 있지만 오보에 이외의 관악기를 위한 작품은 한 곡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오보에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보에 협주곡 제2번 1악장 알레그로는풍부한 선율과 리듬이 두드러진 악장으로 하나의 주제와 선율이 마치 태피스트리를 짜듯이 점차 복잡한 연결과 확대를 통해 새롭게 발전해 가는 과정이 흥미로운 곡입니다.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산 마르코 성당 안에 가득 울려 퍼지는 오르간 소리의 엄숙함과 거룩한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듯한 뭉클함과 아름답고 비장하며 처연한 느낌도 들게 하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듯한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와 금빛 찬란하게 빛나는 바로크 시대 베네치아의 풍경을 연상케 하는 토마소 알비노니의 <오보에 협주곡 D단조 op.9 no2번 I Allegro > 함께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문화/예술/스포츠
    2023-02-19
  • [기고문] 마음과 마음.
    [GN뉴스=경기도]정향=[기고문] 마음과 마음.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는 어른이 보아도 충분히 감동스러운 좋은 영화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보다가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끝이 찡해져서 안그런 척 애를 쓰던 기억이 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잊히지 않고 기억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나신 고 이어령 교수님은 그의 마지막 저서에서 스스로를 외롭고 실패한 삶이었다고 고백해서 놀랐습니다. 겉보기에는 누구보다 훌륭하고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보였는데 그렇지 않다고 고백한 이유는 친구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 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주변에는 경쟁자만 있었다는... 돈이 많아도, 누구나 알아보는 유명 인사가 되었어도 마음 나눌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혹시 내 주변에는 차 한 잔 같이 나눌 누군가가 있나요? 아직도 그늘진 곳에는 눈도 있고 얼음도 남아 있지만 분명 햇살과 바람이 따뜻한 봄을 마중하고 있습니다. 편안한 음악과 차 한 잔으로 소소한 이야기와 웃음 그리고 공감을 나눌 누군가와 함께 행복한 봄맞이가 되기를 바라는 오후입니다. 글, 사진 정향.
    • 문학
    2023-02-19
  • 연천수레울아트홀, 새해 문화가 있는 날 첫 공연 ‘첼로가야금’
    [GN뉴스=연천군]이성아 기자=연천수레울아트홀은 오는 3월 31일 오후 7시 2023년 문화가 있는 날 첫 공연으로 ‘첼로가야금’을 선보인다. 첼로가야금은 오스트리아 출신 첼로 연주자 ‘김 솔 다니엘’과 가야금 연주자 ‘윤다영’이 독일 베를린에서 만나 결성한 듀오이다. 이 듀오는 2016년 결성됐을 때부터 유럽 곳곳에서 이목을 끌어왔으며, 2017년 국내에 입성한 뒤 다양한 무대를 통해 수림문화재단, 서울남산국악당의 우수 예술인으로 선정되는 등 널리 인정받고 있다. 공연은 다른 매력을 지닌 두 악기가 만나 각자의 고유한 특징이 어우러진 하모니를 보여준다. 이러한 하모니는 우리가 삶 속에서 겪는 이질적인 것들과의 화합 과정과 닮아있어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공연은 48개월 이상 관람 가능하다. 관람료는 1층 1만원, 2층 5천원이며, 예매는 전화(031-834-3770) 및 홈페이지(www.sureul.com)에서 하면 된다.
    • Daily
    2023-02-16
  • (사)한국음악협회 가평지부 윈드오케스트라 창단연주회
    [GN뉴스=가평군]이성아 기자=유튜브 뉴스
    • 문화/예술/스포츠
    2023-02-15
  •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9편
    [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유튜브 뉴스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이번 시간에 소개해 드릴 음악가는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입니다.185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100여 편의 오페레타와 미완성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로 기억되는 작곡가입니다.자크 오펜바흐는 1819년 6월 20일, 독일 쾰른에서 유대교 칸토르(유대교 예배가 진행될 대 기도를 선창하며 전례를 이끄는 사람.)이 자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이자크 유다 에버스트(Issac Juda Eberst)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살던 시기에는 나폴레옹 칙령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계승되어오던 가족성을 바꿔야 했었는데요, 그는 순회 공연을 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이미 관객들에게는 오펜바흐 암 마인의 출신이라하여 그 오펜바흐라 불리고 있었기 때문에 성을 오펜바흐로 바꾸었고 그의 아들에게는 태어날 딩시 야코프 오펜바흐(Jakob Offenbach)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오펜바흐는 프랑스에 정착한 후 '자크'로 이름을 변경하게 됩니다. 오펜바흐는 여섯 살 때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여덟 살 때 작곡을 시작했으며, 아홉 살때에는 첼로를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1833년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파리 음악학원에 입학을 시켰지만 어린 자크는 음악학원을 오래 다니지 못하고 1년만에 음악학교를 그만두게 된 후 오케스트라를 전전하면서 보헤미안(프랑스 집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오펜바흐는 유별나고 반항적인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했으며 자신도 유별난 구석이 많았습니다.그는 근시였고 빼빼 말랐으며 엄청나게 큰 코와 긴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페라 코미크 교향악단의 첼로 연주자 자리로 들어가서, 많은 기악곡을 작곡하였습니다. 1844년 오펠바흐는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하고, 에르미니에 드 알카인과 결혼하였습니다. 1848년 그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폭력사태를 피하기 위해 그의 아내와 딸과 함께 독일로 돌아왔으나 일 년 뒤 파리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1855년 샹젤리제의 작은 극장을 임대하여 그곳에서 작은 규모의 자신에 작품들을 선보였고, 그 중 많은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1858년, 오펜바흐는 그의 첫 번째 장편 오페레타 "Orephée aux enfers" ("저승의 오르페우스")를 제작했는데, 이것은 엄청난 호평을 받게 되고 그의 가장 많이 연주된 작품 중 하나로도 남아 있습니다.1860년대 동안, 그는 단막 작품뿐만 아니라 적어도 18편의 장편 오페레타와 더 많은 단막 작품들을 제작했습니다. 오펜바흐의 멜로디에 대한 재능과 함께, 이 작품들의 종종 성적 음모에 대한 리스크 유머와 대부분 온화한 풍자적인 농담은 그것들을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했고, 번역된 번역본은 비엔나, 런던, 그 밖의 유럽에 다른 곳에서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오펜바흐는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과 관계를 맺게 되었고, 황제와 그의 궁정은 오페 바흐의 많은 오페라에서 풍자 되었습니다.나폴레옹 3세는 그에게 프랑스 시민권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발발과 함께, 오펜바흐는 그의 제국적 연줄과 독일 태생이라는 이유로 파리에서 인기는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비엔나와 런던에서는 여전히 성공을 하고 있었습니다.그는 1870년대에 파리에서 그의 초기 애호가들과 일련의 신작들에 부활로 다시 자리를 잡았고, 인기 있는 미국 투어를 시작하게 됩니다.말년에 그는 ‘호프만 이야기(The Tales of Hoffmann)’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파리의 몽마르트 묘지에 묻혀있습니다. 오페라인 호프만 이야기는 그의 다른 작품보다 진지한 편인데, 아마도 어릿광대가 진지하게 여겨지기 바라는 영원의 소망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1880년에 그의 사망으로 미완성인 채 남아있었으나, 친구인 에르네스트 기로에 의해 완성되고, 1881년에 초연되었습니다.오펜바흐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정기적으로 공연되고 있습니다.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아홉 번째 시간에 들려드릴 작품은‘자클린의 눈물(Harmonies des bois, Op. 76: No. 2 Les Larmes de Jacqueline)’입니다.오펜바흐의 유작 중 미발표된 곡으로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잊혀져 있다가 그가 사망하고 65년이 지난 후에 독일의 첼리스트인 토마스 미푸네 베르너(Tomas Mifune Werner 1941~)가 1986년 첼로 소품들을 모아 발매한 ‘저녁의 하모니(Harmonies de Soir)’앨범의 첫 번째 곡이기도 합니다. 미발표된 이 악보를 우연하게 발견한 토마스 미푸네 베르너는 동시대를 살았던 첼리스트인 자클린의 이름을 붙여 연주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 곡이 '자클린의 눈물'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자클린의 눈물'이 유명해지게 된 까닭에는 그녀의 영화 같은 일대기의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영국 태생인 자클린 뒤프레는 5살 때부터 런던 첼로 학교에 입학한 천재 첼리스트였답니다.그녀는 1962년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어요..1966년 자클린은 미국 데뷔 후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나 뜨거운 연애를 시작했으며, 1967년 22세의 젊은 나이에 다소 이른 결혼을 하게 됩니다.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해 슈만과 클라라 이후 가장 아름다운 음악가의 결합으로 축복을 받으며 같이 활동을 해 나가죠.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1971년 갑자기 '다발성경화증'이라는 병에 걸리고 맙니다.'다발성 경화증' 은 시력이 소실되면서 시력을 잃게 되기도 하며 감각 또한 느끼지 못하고 온몸에 마비가 오는 증상이랍니다.결국 1973년부터 연주 활동을 중단하였고 첼리스트의 삶을 무너뜨린 병마에 시달리며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 바렌보임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녀를 뒤로하고 비정하게도 다른 여자와의 사랑을 위해 그녀의 곁을 떠나고 맙니다."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하며 주변에 자주 묻기도 했다던 그녀.그녀는 결국 1987년 42세의 나이로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병세가 가장 극심한 때 그녀를 떠났던 바렌보임은 그녀가 죽은 후에도 그녀의 무덤조차 찾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자클린은 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앉아 보내던 시절에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첼로는 외로운 악기다. 다른 악기나 지휘자가 있는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첼로로 음악을 완성 시키기 위해선 음악적으로 강한 유대를 가진 보조자가 필요하다. 나는 운이 좋아 다니엘을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연주하고 싶었던 곡을 거의 다 음반에 담을 수 있었다.“안타까운 자클린의 슬픈 사연을 눈물로 위로하는 ‘자클린의 눈물’겨울의 끝자락, 마음을 위로하는 자크 오펜바흐의 작품함께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 문화/예술/스포츠
    2023-02-12
  •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8편
    [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유튜브 뉴스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이번 시간에도 역시 고전 낭만주의의 대표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브람스는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과 첼로 이중 협주곡, 관현악 서곡(대학 축전 서곡, 비극적 서곡), 세레나데 등 수많은 관현악 작품들이 있습니다.또한 브람스는 가곡(Lied)에서도 중요한 작곡가로서 200곡이 넘는 가곡을 썼는데 그가 죽기 직전에 쓴 오르간 합창 전주곡(chorale preludes) Op.122는 오르간 주자의 중요한 연주곡목이기도 합니다.피아니스트로서도 그는 꽤 많은 자신의 작품들을 초연하였고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과 함께 당대의 뛰어난 연주자로도 인정받았습니다.브람스의 여러 작품은 현대 음악회에서도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입니다. 브람스는 전통주의자이자 혁신자였습니다. 구조나 작곡 기법 면에서 그는 바로크와 고전파 음악에 굳게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대위법의 대가였습니다.이런 구조와 함께 그는 화성과 음색에 대한 대담하고도 새로운 시도로 당대 조성음악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의 업적과 기예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에서 에드워드 엘가에 이르기까지 후대 여러 음악가들의 찬탄의 대상이었으며, 브람스의 작품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 한세대의 음악 가군의 시작점이자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브람스의 작품은 고전파적인 양식을 바탕으로 중후하고 북독일적인 면을 강하게 지니며 또한 아름다운 서정적인 면도 갖고 있습니다.그가 작곡한 4개의 교향곡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걸작으로 그중에서 교향곡 1번은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에 이어지는 제10번 교향곡이라고 할 만큼 베토벤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쌓아 올린 뛰어난 작품입니다.바이올린 협주곡도 놀랄 만큼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베토벤의 곡에 비견될 만한 가치가 있으며, 피아노 음악에서도 화려한 기교를 배격하고 중후한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브람스는 고전 작곡가인 모차르트와 하이든을 사랑했으며, 특히 모차르트를 너무나 존경하여 말년에는 모차르트를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선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품의 성향은 모차르트보다는 베토벤과 더 닮아있습니다.브람스는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적인 비범함으로 작품을 창조해낸 음악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느릿느릿한 소걸음이지만 클라라와의 관계를 비롯해 삶의 경험으로 체득한 감성을 음악적 언어로 훌륭하게 풀어냈습니다.그의 작품들은 모차르트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영감으로 창조된 것도 아니고 베토벤처럼 파격적이지도 않았지만, 한 개의 음도 소홀하지 않았으며 하나의 악상을 정성껏 다듬어 그것을 조립하여 튼튼한 토대 위에서 많은 시간을 공들여 고민하고 끊임없은 노력으로 완성하여 만들어낸 작품들인 것이었던 것입니다. 브람스는 1854년에 첫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은 했지만 스승인 슈만이 용기를 주고 재촉한 탓에 1855년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22년이 지난 후인 1876년까지 발표되지 않았는데 그가 완전히 만족할 때까지 작품은 편집과 교정을 거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브람스는 음악을 신중하게 작곡하는 성격이라 한 번 쓴 것을 여러 번 고치고 하여 다소 인위적인 가공의 미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또한 그런 면으로 볼 때 짜깁기의 천재라 할 정도로 여러 선율을 짜깁기 합니다. 이런 면에서는 한번 악상을 들으면 끝까지 한 곡의 노래가 그려지는 모차르트와 대조적이며, 그 외에도 성악곡이 200여 곡이나 있는데 슈베르트와 대조적으로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인위적인 가공의 맛이 있습니다.브람스의 음악은 마음속에서 필터링하여 다스림으로써 옛 형식에 새로운 관념들을 담아내어 고전파와 낭만파의 상호 모순적인 감성들을 결합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래서 브람스는19세기 후반기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음악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1896년은 클라라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77세의 나이로 타계한 해인데, 같은 해 브람스는 오래전부터 클라라의 죽음을 준비하며 쓴 가곡인 <네 개의 엄숙한 노래(Vier ernste Gesänge)>를 완성합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그 내용을 가지고 왔는데 모든 세속적인 것에 대한 허망함을 다루고 있으며 근심과 고통의 구원자로서 죽음을 맞아들이는 비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그리고 이듬해인 1897년 4월, 브람스는 스승이자 가슴 깊이 사랑한 클라라의 뒤를 이어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브람스는 오르간을 위한 열한 개의 코랄 전주곡(Eleven Chorale Preludes)을 통해 음악으로 유서를 남겼는데, 일생이 낭만주의자 그 자체였던 그가 세상과의 작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듯 한 곡입니다.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여덟 번째로 소개해 드릴 곡은...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Symphony No. 3 in F major, Op. 90 - III. Poco Allegretto)입니다.1883년 5월 브람스가 빈을 떠나 독일 남서부 비스바덴으로의 여름휴가를 갈 당시 작곡하기 시작해서 브람스가 50세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브람스가 비스바덴에 머무르면서 그곳에 살고 있던 알토 가수 헬미네 시퍼스를 향한 그의 애정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교향곡을 쓰도록 자극하여, 대략 4개월 만에 완성된 작품이라고 합니다.시퍼스에 의하면 브람스는 비스바덴의 고요한 숲속을 방랑자처럼 거닐며 악상을 떠올리곤 했다고 전했다고 합니다.교향곡 3번은 1883년 12월 2일 한스 리히터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서 초연되어 미학적으로 완벽하다는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작품입니다.특히나 3악장 포코 알레그로(Poco Allegretto)는 20세기 영화음악이나 대 중음악 등에 샘플링되어 쓰이면서 교향곡 자체보다 더 유명해진 악장입니다. 포코 알레그로는 알레그로보다는 조금 느린, 조금 빠르게를 의미합니다.전형적인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힘차고 화려한 제1주제와 단아하고, 소박하고 평화로우며 서정적인 제2주제가 대비됩니다. 특히 제2주제에는 피아노-피아니시모-피아노의 진행을 보이고 있는데, 이전 교향곡에 비해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제시부의 시작은 관악기가 뿜어내는 F-As-F로 이어지는 단 3도의 motif로 시작됩니다. 이어서 제1주제가 튜티로 전개되는데 고음의 바이올린과 트롬본, 그리고 팀파니의 트레몰로로 강렬하게 진행됩니다.재현 부는 제시부의 코데타 부분까지의 진행과 거의 비슷하며 코다에 들어서면 갑자기 강렬하게 울리고 제1주제가 힘차게 연주하면서 곧바로 현악기에 의한 주제 선율이 이어집니다. 곡의 클라이맥스를 지나면 점차 차분해지면서 바순과 오보에가 기본 선율을 나타내며 더블베이스와 첼로로 시작되는 부분에서 바이올린의 제1주제가 나온 후 차분히 곡은 마치게 됩니다.브람스는 주변에 인복도 참 많았고 인성도 좋았으며 꾸준한 노력을 통해 음악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요제프 요하임, 멘델스존, 리스트와 바그너, 안톤 루빈스타인과 사라사테 등 여러 낭만주의 음악가들과의 인연, 특히 슈만과 클라라 슈만과의 특별했던 관계처럼 한편의 소설 같은 인생을 살다간 고전파 낭만주의자 요하네스 브람스그의 푸근하고 서정적인 교향곡 3번 3악장, 함께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문화/예술/스포츠
    2023-02-05
  •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7편
    [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유튜브 뉴스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저번 시간에 이어 고전 낭만주의의 대표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1850년 무렵 이미 리스트와 바그너가 주도하는 ‘신독일 악파’와 슈만이 대표하는 ‘보수 주의 악파’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브람스에 대한 슈만의 격찬은 ‘신독일 악파’쪽 음악가들에겐 마땅치 않은 반응을 얻고 있었지만 리스트는 브람스의 음악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그러나 브람스는 자의식적인 모더니스트들이라 생각했던 ‘신독일 악파’에게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이때부터 브람스는 ‘신독일 악파’와 ‘보수 주의 악파’의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의 인생에서 대부분의 혼란은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되게 됩니다.‘신독일 악파’ 그룹에는 영향력을 지닌 당대의 문장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슈만과 그의 지인이 창간하였으나 1845년 이후 ‘신독일 악파’ 추종자인 브렌델(F. Brendel)에게로 책임 편집자 자리가 넘어간 음악 신보(NeueZeitschrift für Musik)를 중심으로 해서 ‘신독일 악파’의 대외적인 창구로 삼아 리스트의 ‘교향시’와 바그너의 ‘음악극’을 적극 옹호하며, 그 밖의 음악 장르는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해버렸습니다. ‘신독일 악파’와 ‘보수 주의 악파’ 그룹의 대결은 두 가지의 국면을 갖습니다.첫 번째는 리스트와 ‘프로그램 음악’이 논쟁의 핵심에 서 있던 시기였고;두 번째는 리스트가 1861년에 바이마르에서 로마로 거주지를 옮기고 나서부터였습니다.이때부터는 바그너의 작품이 논쟁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는데 이 논쟁은 1876년 브람스가 교향곡 1번을 작곡하여 대중 앞에 선보이면서, 교향곡이라는 장르와 교향악적 양식이 마치 새롭게 기초가 건설되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이들 두 그룹의 싸움은 유야무야되었는데요 두 그룹에 속했던 음악가들과 이들을 지지하던 청중들이 상대방의 작품을 긍정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850년 슈만 부부와 첫 조우 이후 브람스는 점차 슈만의 가족들과도 가까워졌으며, 1854년 슈만이 처음 정신질환을 앓았을 때에는 클라라 슈만을 도와 슈만의 가정 사정을 살피게 됩니다.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그의 음악이 왜 비 오는 날이나 늦은 가을에 감상하기에 알맞은지, 왜 그토록 애절하고 우울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작곡가들은 수많은 러브스토리를 만들어 냈지만 특히 브람스처럼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평생 해바라기같이 한 여인을 바라보며 가슴 앓이를 한 작곡가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슈만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예술가로서의 압박감도 매우 크게 느끼고 있었으며 사교적이지도 못했습니다.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그로 인해 정서적으로 피폐해지면서 이전부터 조금씩 엿보이던 우울증은 환청, 환각 등의 정신분열증 세로 악화되어 갔습니다. 정신병으로 자살한 13세 위의 누나와 슈만처럼 정신 병동에서 생을 마친 슈만의 차남을 유추해 보면, 그의 정신병은 외부 요인보다는 집안 내력으로 인한 유전적인 질병이 아니었나 하고 전해집니다.망상과 환청에 시달리며 심령술에 의지한 슈만은 결국 1853년 11월 뒤셀도르프 관현악단 지휘자 자리를 그만두게 되었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클라라 혼자서 버는 연주비와 레슨비로는 6명이나 되는 자녀들의 양육비와 슈만의 치료 비용을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이 무렵에 듬직한 젊은 독일 청년, 브람스가 추천장을 들고 그의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슈만은 브람스가 작곡한 곡에 감탄하면서 그의 평론지 ‘음악 신보’에 극찬을 하여 브람스를 음악계에 크게 알린 얼마 뒤 라인강에 투신을 하였지만 다행히 지나는 고깃배에 의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짐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슈만은 자진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당시 클라라의 일기에는 ‘슈만의 음악을 연주하며 그의 숨결을 느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온몸이 그의 음악 속에 녹아내리는 듯하다’라고 슈만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투신 소동 이후 여섯 아이의 엄마이자 임신부였던 클라라가 힘들게 생계를 꾸려가는 것을 본 브람스는 가족의 일원인 듯 슈만 가족을 성심성의껏 돌보았습니다. 브람스에게 클라라는 꿈에 그리던 여성상이었고, 자신의 작품을 가장 완벽하게 해석하고 연주해 주는 거장이었습니다. 브람스는 어느새 사랑이 된 클라라에게 편지를 쓰게 됩니다.“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사용해 당신을 불러보고 싶습니다.”그러나 클라라에게는 당장 슈만의 병원비와 갓 출산한 자녀를 포함해 7자녀의 양육 문제도 벅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연주 기획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더 컸을 것입니다. 그의 일기에 나타나듯이 항상 슈만의 음악과 함께했기 때문에 외로움이나 정서적인 공허함도 느끼지 않았던 클라라는 브람스의 사랑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슈만의 아내로만 살기를 원했습니다.브람스는 슈만보다는 23세, 클라라보다는 14세 연하로 ‘연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어린 나이였습니다. 클라라에게 열렬한 사랑 편지를 보내고서 겨우 2년이 지난 1858년, 25세의 브람스는 괴팅겐 대학교수의 딸이자 명망가 출신의 아가테 폰 지볼테(1835~1909)와 약혼을 하게 됩니다.적극적으로 구애하던 브람스는 성악을 공부하던 아가테를 위해 ‘8개의 노래와 로맨스-작품 번호 14’와 ‘5개의 시-작품 번호 19’를 작곡하기까지 하지만 결혼 일정을 잡아야 하는 시기에 이르자 브람스는 사랑은 하지만 속박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돌연 파혼을 선언합니다.갑자기 파혼을 당한 아가테는 심한 충격에 빠져 10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결혼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후 브람스는 클라라의 셋째 딸인 율리와 사랑에 빠지지만, 1869년 율리는 이탈리아의 마름모 리트 백작과 결혼을 했고, 브람스는 이 황량한 마음을 담아 ‘알토 랩소디’를 작곡합니다.일부에선 클라라가 브람스와 율리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가족을 위해 헌신한 클라라가 둘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갑자기 파혼을 선언할 정도로 구속당하기 싫어하는 성향의 남자를, 더구나 이전 연주여행 동안 수많은 남자 음악가의 자유연애 행각을 접한 클라라가 딸의 평생 배필로 브람스를 인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곱 아이의 양육비와 투병생활 끝에 사망한 남편을 떠올리면 클라라에게 작곡가 사위는 달갑지 않았을 것이었습니다.클라라는 슈만이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1856년부터 40년 동안 슈만 부인으로 남아 슈만과 브람스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그녀의 연주에 단골 레퍼토리가 된다는 것은 브람스에게는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입니다.클라라가 위독하다는 비보를 접하고 40시간 동안 달려왔지만 결국 임종을 지키지 못한 브람스는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 비통해했고 “삶의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었고 가장 위대했던 가치였으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잃어버렸다”라며 탄식했다고 합니다.클라라는 77년 생애 중 16년의 결혼생활 동안 슈만을 사랑했고, 43년간 브람스와 만나면서 그들은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되었다. 브람스의 음악은 독일 음악의 전통을 존중하며 견고한 구성감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주의적인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쩌면 브람스의 음악은 클라파로 인해 만들어진 클라라가 남긴 유품일 수도 있겠습니다.1857~60년 브람스는 데트몰트 궁정과 괴팅겐 궁정 사이를 옮겨 다니며 피아노를 가르치고 합창단을 지휘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1859년에는 함부르크에 있는 여성합창단의 지휘자로도 임명이 되게 됩니다.그러한 직책들은 그에게 유용한 실제 경험을 제공했으며, 자신에게도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습니다.정서적 갈등이 어느 정도 해결되자, 그의 창작은 날로 활발해져 갔습니다.1861년경 함부르크로 돌아간 그는 다음 해에 빈을 처음 방문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1863년 빈에 정착하여 아마추어 합창단 체인 '징아카데미'(Singakademie)의 감독이 되었고 그곳에서의 생활은 연주회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기복, 자신의 급한 성격으로 인한 언쟁, 그의 지지자와 바그너·브루크너 지지자 사이의 극심한 대립, 그리고 이루지 못한 1~2건의 연애사건 등의 소란을 제외한다면 전반적으로 평이하고 조용한 것이었습니다.몇 번의 실패와 바그너 주의자들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그의 명성 또한 점점 높아져갔습니다. 빈에서 두 가지 직책을 가지고 있는 동안 브람스의 작품은 전성기를 맞았으며 그의 가장 중요한 몇몇 작품들이 이때 작곡되었습니다.1868년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합창 작품인 독일 진혼곡(Ein Deutsches Requiem)이 완성되었는데, 브레멘에서 이 작품이 초연되었을 당시, 청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그 후 독일 전역에서 연주되게 됩니다.지금도 19세기 합창음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간주되는 이 작품으로 브람스는 독일 작곡가들 중 선봉에 있습니다.1872년경 그는 '음악동호인 협회'의 총지휘자가 되었으며 3시즌 동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었습니다.그가 선택한 곡목들은 기대했던 것만큼 보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지휘했던 작품 가운데는 베를리오즈의 이탈리아의 아롤드(Harold en Italie)가 포함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비록 '브람스 주의자'들은 바그너에 대한 그들의 투쟁을 계속했지만 브람스 자신은 항상 그의 경쟁자에 대해 경의를 표했습니다.다음 시간도 브람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텐데요, 다양한 그의 작품세계와 후세의 평가 그리고 말년의 브람스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이번 시간에 들려드릴 곡은Brahms /String Sextet Op18 ll. Andante ma moderato브람스 현악 6중주 1번 2악장으로 일명 <브람스의 눈물>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곡입니다.이 곡은 '라 폴리아 ' 변주라고도 하는데 브람스가 평생을 사랑했던 스승 슈만의 부인'클라라'를 향한 사랑과 애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곡입니다.브람스 음악의 본바탕은 실내악에 잘 나타나 있는데 모두 24곡으로 그는 화려하고 크게 장식적인 것을 피했습니다. 브람스는 기본적인 현악 4중주에다 다시금 비올라와 첼로를 첨가시켜 현악 6중주를작곡했는데 <1>번은 1859년 가을부터 다음 해 여름에 걸쳐 작곡했으며, 전원적이고 밝은 기운으로 가득한 명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현악 6중주는 단 2곡으로 1번은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행복하고 큰 성과를 이루고 있을 시기의 작품이며 따라서 즐겁고 행복하며 젊고 정열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그중 2악장은 진지하고 무거운 남자가 눈물을 흘리듯 굵고 묵직한 선율이 흘러나옵니다.아울러 신성하고 색채가 풍부하며 음향적인 데다가 단순하고 민요풍의 선율이 풍성합니다. 브람스는 2악장을 피아노 3중주곡으로 편곡한 후, 클라라의 41번째 생일에 선물로 준 것으로 유명합니다.슈만이 세상을 떠난 뒤 브람스에게 클라라는 사랑의 감정을 넘어 평생을 두고 좋은 스승이며, 친구이며, 조언자로써 남았습니다.그런 젊은 시절의 사랑을 평생 가슴에 묻고 지낸 그이기에 브람스의 음악은 남자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음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브람스의 눈물'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듣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 2악장... 함께 감상해 보겠습니다. [신동아 2012년 6월 호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신독일악파와 보수주의의 대립 (서양음악사 100장면, 2002. 7. 20., 박을미, 김용환) 참고.
    • 문화/예술/스포츠
    2023-01-27
  •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6편
    [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유튜브 뉴스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음악가는 요하네스 브람스, Johannes Brahms (7 May 1833 – 3 April 1897)입니다. 클래식 음악사 중 가장 위대한 독일 작곡가 세명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바흐(Bach)와 베토벤(Beethoven) 그리고 브람스(Brahms)를 꼽습니다, 이 세 사람을 일컬어 이른바 ‘독일의 3B’라고 칭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 사람의 이미지는 제각각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데요, 평생을 종교 음악에 헌신한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란 별명처럼 근엄하고, 악성 베토벤은 그의 교향곡처럼 초월적이고 직설적이며, 브람스의 이미지는 ‘고전적 낭만주의자’라는 수식어처럼 푸근하고 인간적입니다. 브람스는 다수의 협주곡과 교향곡, 피아노곡, 합창곡, 실내악 등 200여 곡이 넘는 가곡을 작곡했습니다. 그의 음악을 말할 때면 언제나 논하게 되는 양면성 즉, 명과 암, 희망과 절망, 엄격함과 온유함, 그러한 극단적인 두 개의 정서가 교차되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1833년 5월 7일 북부 독일의 항구도시인 함부르크에 위치한 아파트의 좁은 방에서 호른과 더블베이스 연주자인 요한 야코프 브람스(Johann Jakob Brahms, 1806–1872)와 요하나 헨리카 크리스티아네 브람스(Johanna Henrika Christiane Brahms, 1789–1865)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요한 야코프 브람스는 가업으로 이어오던 여관 경영을 이어받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고향인 하이데 라는 작은 도시를 뛰쳐나와 함부르크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음악가를 지망했던 요한 야코프 브람스는 항구 근처 술집에서 호른을 연주하며 활동하다가 바빌리온의 6중주 단원이 되어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명곡을 쉽게 편곡하여 연주하였다. 그러던 그는 같은 하숙집에 묵고 있는 요하나 헨리카 크리스티아네 니센(혼전성)과 친하게 되었고 일주일 만에 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됩니다. 당시 신랑은 24세, 신부는 혼기를 놓쳐버린 17세 연상의 여인이었습니다. 1830년 당시로서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나이 차이였습니다. 브람스는 5살부터 그의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웠고 7세 때 코셀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됩니다. 브람스의 부모는 어린 브람스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그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 천재 신동 음악가로서 돈을 벌려 하였으나 코셀이 강하게 반대하여 미국행은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브람스는 10살 때 코셀의 스승이었던 에두아르트 마르크스젠에게 보내져 가르침을 받게 되었고 마르크스젠에게서 작곡법과 음악론을 배우면서 훌륭한 음악가가 되겠다는 의지를 다지기 시작하여 11살 때부터는 작곡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작곡된 브람스의 여러 곡들은 대부분 파기되거나 유실되었다고 합니다. 14세에서 16세 때에 브람스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생계를 위해 학교를 결국 중퇴하고 집안 살림을 돕고자 노버의 항만지역에 있는 허름한 여인숙 그리고 연회장과 술집, 식당 등을 전전하며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때로는 피아노 교습을 하는 동안에도 틈나는 대로 합창단을 지휘하고 합창 음악을 편곡하기도 하면서 틈틈이 작곡도 하고 독주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훌륭한 합창 음악을 창작할 수 있게 된 배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1850년에 그는 유대계 헝가리의 바이올린 연주자인 에두아르트 레메니(Eduard Reményi, 1828–1898)를 만나 함께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그로 인해 브람스가 일생 동안 영향을 받았던 헝가리의 민족음악을 배우게 됩니다. 1853년 4월과 5월에 헝가리 레메니의 반주를 맡아 연주 여행을 함께 떠날 때까지 그의 작품은 그리 크게 대중의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여행 중 하노버에서 그는 헝가리 태생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지휘자이며 작곡가인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 1831-1907)을 만남으로써 첫 번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바이마르 궁정에서 프란츠 리스트, 피터 코르넬리우스, 요아힘 라프를 만나게 됩니다. 브람스가 리스트와 만나게 되었을 때 리스트는 브람스의 스케르초 Op.4를 초견으로 연주하였다고 합니다. 몇몇 증언에 따르면, 브람스가 리스트의 소나타 B단조 작품을 그리 칭찬하지 않아 리스트의 기분이 상했었다고 전했는데 사람들은 아마도 브람스는 당시 여행에 지쳐있어 이 연주를 하고 있을 때 졸고 있었던 것 이 아니었나 추측하였고 브람스 또한 당시 여행으로 지쳐 어쩔 수 없었노라고 나중에 변명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브람스의 재능을 높이 산 요아힘은 로베르트 슈만에게 편지를 써서 브람스를 소개하였습니다. 라인란트의 연주 여행을 끝내고 브람스는 기차를 타고 뒤셀도르프로 가 슈만 부부에게 크게 환대를 받습니다. 로베르트 슈만은 젊은 브람스의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 젊은 음악가를 세상에 소개하고자 1853년 10월 28일 음악 신보, [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서 평론 「새로운 길」이라는 기고문을 발표하여 브람스는 전 유럽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로베르트 슈만은 이 평론에서 "이 시대의 이상적인 표현을 가져다줄 젊은이"로 브람스를 소개하여 관심을 일으켰지만 슈만의 지인 지인들에게 이러한 평론이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작품과 기술을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 했던 브람스에게 자기비판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어려운 상황은 항상 있었지만 이때부터 브람스는 서서히 음악세계의 중심권에 있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브람스와 슈만 부부와의 인연과 브람스와 리스트로 대표되었던 신독일악파와 정통파로 대립했던 유럽 음악계의 이야기와 브람스의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여섯 번째 소개해 드릴 곡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4번(Hungarian Dances WoO. 4 In F Minor)과 5번(Hungarian Dances WoO. 5 In F-Sharp Minor)입니다. 동유럽의 헝가리 집시들의 음악은 유랑 생활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으며 애수에 차있고 이국적인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한 가지의 스타일이라기보다는 그리스, 터키, 유대, 비잔틴, 슬라브, 아랍 등 여러 도시와 민족을 만나고 영향을 받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된 음악 형태로 나타나며, 특히나 스페인으로 넘어가면서 플라멩고 음악의 탄생에 기원이 됐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이들의 음악은 15세기 헝가리 문헌에도 기록돼있을 정도이고 19세기 헝가리 음악사에도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이 음악은 3부 형식의 테마를 무겁게 때론 가볍게, 애수 젖은 느린 서주로 시작해서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듯한 빠른 템포들로 마무리되는 차르다시 (Csárdás-헝가리에 많이 사는 집시들의 민속춤곡이다) 풍을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무곡 4번 F단조는 조금 음을 길게 꿀어서 빠르고 생기 있게 연주하라는(포코 소스테누토-비바체 Poco sostenuto-Vivace) 템포 지시가 붙어있습니다. 특히 헝가리 무곡 5번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중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이기도 합니다. 채플린이 나치와 히틀러를 풍자한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도 등장하는데, 1940년 제작 당시 많은 유태인들과 집시들이 나치에 의해 학살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유럽 각국에서는 고단한 유랑 생활을 하는 집시들에게 직업을 갖도록 하고 이들을 ‘찌고이너(Zigeunerweisen)’ 또는 신 헝가리인으로 불렀는데, 브람스가 곡 제목에 헝가리를 붙인 이유도 이런 소외된 자들을 위한 음악이란 뜻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브람스의 무곡은 4개의 작품집 속에 21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중 11번 14번 16번 곡만이 브람스의 창작 작품이고, 나머지는 헝가리 집시음악을 편곡한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브람스가 헝가리 음악에 큰 영향을 받았던 레메니와의 표절 분쟁이 있었고 그때 브람스는 작곡자가 아닌 편곡자로 출판되어 승소는 하게 되었지만 브람스의 무곡에는 음악가의 작품 번호를 뜻하는 op 대신 ‘작품 번호 없는’이란 뜻의 WoO(Werke ohne Opuszahl ("Works without opus number"))가 붙습니다. 보통 작품 번호는 사후 음악 역사가 나 후배 음악가들이 작품을 정리하며 부여하는데 정리하다 빠뜨렸거나 의도적으로 뺀 일부 작곡자 작품에는 WoO를 붙여 되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WoO는 20세기 중반이 돼서야 등장했으며 브람스 무곡을 표절의 대상으로 편곡 작품이었던 헝가리무곡에 작품 번호를 붙이기가 쉽지 않아 WoO를 붙이게 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고전 형식에 신선한 예술미와 뛰어난 새로운 기교를 융합하여 절대음악에 정진한 작곡가였고 온후하고 독실한 인격을 지닌, 고전 낭만주의자로 불리웠던 요하네 브람스 그의 낭만적인 음악을 함께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문화/예술/스포츠
    2023-01-22
  • [기고문]길었던 밤이 지나간 새벽에.
    [GN뉴스=경기도] 길었던 밤이 지나간 새벽에. 어느 늦은 가을날 무작정 카메라에 얇은 점퍼 하나 입고 떠난 짧은 여행길에서 아침 햇빛을 간절히 기다리던 새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단출한 여행자에게 밤의 찬 기운은 맨몸으로 맞서기에는 너무 힘든 벽이었습니다. 준비 없이 떠난 길이 무모했노라 후회도 했지만 당장 찾아온 밤을 지나가야 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둘러보면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많은 집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곳에는 따뜻한 공간과 정겨운 가족들이 있으니까요. 온 몸에 밀려오는 차가운 한기를 막아내려 버둥대는 몸부림으로 영원 같은 순간을 지나가는 밤은 너무 길고도 길었습니다. 까무러치듯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며 버텨낸 밤이 새벽으로 달려가고 어둠이 물러간 후 성냥팔이 소녀의 손에 들렸던 작은 불처럼 옅은 아침 햇살이 비칠 때 보는 것만으로도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그 긴 밤을 지나고 나니 햇살 한 조각 따스함이 얼마나 고마운 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햇살뿐인가요? 아무런 감흥 없이 지나온 일상 속에서 감사해야 할 작지만 너무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작은 것들이 모여 행복이 되는 것을, 너무 욕심 부리지 않아도 넉넉한 것을 배우는 여행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많이 가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글. 정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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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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