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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편집 2024-05-04(토)
 
  • Brahms /String Sextet Op18 ll. Andante ma moder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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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유튜브 뉴스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저번 시간에 이어 고전 낭만주의의 대표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850년 무렵 이미 리스트와 바그너가 주도하는 ‘신독일 악파’와 슈만이 대표하는 ‘보수 주의 악파’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브람스에 대한 슈만의 격찬은 ‘신독일 악파’쪽 음악가들에겐 마땅치 않은 반응을 얻고 있었지만 리스트는 브람스의 음악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브람스는 자의식적인 모더니스트들이라 생각했던 ‘신독일 악파’에게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브람스는 ‘신독일 악파’와 ‘보수 주의 악파’의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의 인생에서 대부분의 혼란은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되게 됩니다.

‘신독일 악파’ 그룹에는 영향력을 지닌 당대의 문장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슈만과 그의 지인이 창간하였으나 1845년 이후 ‘신독일 악파’ 추종자인 브렌델(F. Brendel)에게로 책임 편집자 자리가 넘어간 음악 신보(NeueZeitschrift für Musik)를 중심으로 해서 ‘신독일 악파’의 대외적인 창구로 삼아 리스트의 ‘교향시’와 바그너의 ‘음악극’을 적극 옹호하며, 그 밖의 음악 장르는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해버렸습니다.


‘신독일 악파’와 ‘보수 주의 악파’ 그룹의 대결은 두 가지의 국면을 갖습니다.

첫 번째는 리스트와 ‘프로그램 음악’이 논쟁의 핵심에 서 있던 시기였고;
두 번째는 리스트가 1861년에 바이마르에서 로마로 거주지를 옮기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이때부터는 바그너의 작품이 논쟁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는데 이 논쟁은 1876년 브람스가 교향곡 1번을 작곡하여 대중 앞에 선보이면서, 교향곡이라는 장르와 교향악적 양식이 마치 새롭게 기초가 건설되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이들 두 그룹의 싸움은 유야무야되었는데요 두 그룹에 속했던 음악가들과 이들을 지지하던 청중들이 상대방의 작품을 긍정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850년 슈만 부부와 첫 조우 이후 브람스는 점차 슈만의 가족들과도 가까워졌으며, 1854년 슈만이 처음 정신질환을 앓았을 때에는 클라라 슈만을 도와 슈만의 가정 사정을 살피게 됩니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그의 음악이 왜 비 오는 날이나 늦은 가을에 감상하기에 알맞은지, 왜 그토록 애절하고 우울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작곡가들은 수많은 러브스토리를 만들어 냈지만 특히 브람스처럼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평생 해바라기같이 한 여인을 바라보며 가슴 앓이를 한 작곡가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슈만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예술가로서의 압박감도 매우 크게 느끼고 있었으며 사교적이지도 못했습니다.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그로 인해 정서적으로 피폐해지면서 이전부터 조금씩 엿보이던 우울증은 환청, 환각 등의 정신분열증 세로 악화되어 갔습니다.


정신병으로 자살한 13세 위의 누나와 슈만처럼 정신 병동에서 생을 마친 슈만의 차남을 유추해 보면, 그의 정신병은 외부 요인보다는 집안 내력으로 인한 유전적인 질병이 아니었나 하고 전해집니다.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며 심령술에 의지한 슈만은 결국 1853년 11월 뒤셀도르프 관현악단 지휘자 자리를 그만두게 되었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클라라 혼자서 버는 연주비와 레슨비로는 6명이나 되는 자녀들의 양육비와 슈만의 치료 비용을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이 무렵에 듬직한 젊은 독일 청년, 브람스가 추천장을 들고 그의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슈만은 브람스가 작곡한 곡에 감탄하면서 그의 평론지 ‘음악 신보’에 극찬을 하여 브람스를 음악계에 크게 알린 얼마 뒤 라인강에 투신을 하였지만 다행히 지나는 고깃배에 의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짐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슈만은 자진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당시 클라라의 일기에는 ‘슈만의 음악을 연주하며 그의 숨결을 느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온몸이 그의 음악 속에 녹아내리는 듯하다’라고 슈만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투신 소동 이후 여섯 아이의 엄마이자 임신부였던 클라라가 힘들게 생계를 꾸려가는 것을 본 브람스는 가족의 일원인 듯 슈만 가족을 성심성의껏 돌보았습니다. 브람스에게 클라라는 꿈에 그리던 여성상이었고, 자신의 작품을 가장 완벽하게 해석하고 연주해 주는 거장이었습니다. 브람스는 어느새 사랑이 된 클라라에게 편지를 쓰게 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사용해 당신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클라라에게는 당장 슈만의 병원비와 갓 출산한 자녀를 포함해 7자녀의 양육 문제도 벅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연주 기획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더 컸을 것입니다.

그의 일기에 나타나듯이 항상 슈만의 음악과 함께했기 때문에 외로움이나 정서적인 공허함도 느끼지 않았던 클라라는 브람스의 사랑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슈만의 아내로만 살기를 원했습니다.
브람스는 슈만보다는 23세, 클라라보다는 14세 연하로 ‘연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어린 나이였습니다.

클라라에게 열렬한 사랑 편지를 보내고서 겨우 2년이 지난 1858년, 25세의 브람스는 괴팅겐 대학교수의 딸이자 명망가 출신의 아가테 폰  지볼테(1835~1909)와 약혼을 하게 됩니다.
적극적으로 구애하던 브람스는 성악을 공부하던 아가테를 위해 ‘8개의 노래와 로맨스-작품 번호 14’와 ‘5개의 시-작품 번호 19’를 작곡하기까지 하지만 결혼 일정을 잡아야 하는 시기에 이르자 브람스는 사랑은 하지만 속박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돌연 파혼을 선언합니다.
갑자기 파혼을 당한 아가테는 심한 충격에 빠져 10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결혼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후 브람스는 클라라의 셋째 딸인 율리와 사랑에 빠지지만, 1869년 율리는 이탈리아의 마름모 리트 백작과 결혼을 했고, 브람스는 이 황량한 마음을 담아 ‘알토 랩소디’를 작곡합니다.

일부에선 클라라가 브람스와 율리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가족을 위해 헌신한 클라라가 둘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갑자기 파혼을 선언할 정도로 구속당하기 싫어하는 성향의 남자를, 더구나 이전 연주여행 동안 수많은 남자 음악가의 자유연애 행각을 접한 클라라가 딸의 평생 배필로 브람스를 인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곱 아이의 양육비와 투병생활 끝에 사망한 남편을 떠올리면 클라라에게 작곡가 사위는 달갑지 않았을 것이었습니다.

클라라는 슈만이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1856년부터 40년 동안 슈만 부인으로 남아 슈만과 브람스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그녀의 연주에 단골 레퍼토리가 된다는 것은 브람스에게는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클라라가 위독하다는 비보를 접하고 40시간 동안 달려왔지만 결국 임종을 지키지 못한 브람스는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 비통해했고 “삶의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었고 가장 위대했던 가치였으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잃어버렸다”라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클라라는 77년 생애 중 16년의 결혼생활 동안 슈만을 사랑했고, 43년간 브람스와 만나면서 그들은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되었다.

브람스의 음악은 독일 음악의 전통을 존중하며 견고한 구성감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주의적인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쩌면 브람스의 음악은 클라파로 인해 만들어진 클라라가 남긴 유품일 수도 있겠습니다.

1857~60년 브람스는 데트몰트 궁정과 괴팅겐 궁정 사이를 옮겨 다니며 피아노를 가르치고 합창단을 지휘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1859년에는 함부르크에 있는 여성합창단의 지휘자로도 임명이 되게 됩니다.

그러한 직책들은 그에게 유용한 실제 경험을 제공했으며, 자신에게도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습니다.
정서적 갈등이 어느 정도 해결되자, 그의 창작은 날로 활발해져 갔습니다.
1861년경 함부르크로 돌아간 그는 다음 해에 빈을 처음 방문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1863년 빈에 정착하여 아마추어 합창단 체인 '징아카데미'(Singakademie)의 감독이 되었고 그곳에서의 생활은 연주회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기복, 자신의 급한 성격으로 인한 언쟁, 그의 지지자와 바그너·브루크너 지지자 사이의 극심한 대립, 그리고 이루지 못한 1~2건의 연애사건 등의 소란을 제외한다면 전반적으로 평이하고 조용한 것이었습니다.
몇 번의 실패와 바그너 주의자들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그의 명성 또한 점점 높아져갔습니다.



빈에서 두 가지 직책을 가지고 있는 동안 브람스의 작품은 전성기를 맞았으며 그의 가장 중요한 몇몇 작품들이 이때 작곡되었습니다.
1868년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합창 작품인 독일 진혼곡(Ein Deutsches Requiem)이 완성되었는데, 브레멘에서 이 작품이 초연되었을 당시, 청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그 후 독일 전역에서 연주되게 됩니다.
지금도 19세기 합창음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간주되는 이 작품으로 브람스는 독일 작곡가들 중 선봉에 있습니다.

1872년경 그는 '음악동호인 협회'의 총지휘자가 되었으며 3시즌 동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곡목들은 기대했던 것만큼 보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지휘했던 작품 가운데는 베를리오즈의 이탈리아의 아롤드(Harold en Italie)가 포함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비록 '브람스 주의자'들은 바그너에 대한 그들의 투쟁을 계속했지만 브람스 자신은 항상 그의 경쟁자에 대해 경의를 표했습니다.
다음 시간도 브람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텐데요,

다양한 그의 작품세계와 후세의 평가 그리고 말년의 브람스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이번 시간에 들려드릴 곡은
Brahms /String Sextet Op18 ll. Andante ma moderato
브람스 현악 6중주 1번 2악장으로 일명 <브람스의 눈물>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곡입니다.
이 곡은 '라 폴리아 ' 변주라고도 하는데 브람스가 평생을 사랑했던 스승 슈만의 부인'클라라'를 향한 사랑과 애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곡입니다.
브람스 음악의 본바탕은 실내악에 잘 나타나 있는데 모두 24곡으로 그는 화려하고 크게 장식적인 것을 피했습니다.

 

브람스는 기본적인 현악 4중주에다 다시금 비올라와 첼로를 첨가시켜 현악 6중주를
작곡했는데 <1>번은 1859년 가을부터 다음 해 여름에 걸쳐 작곡했으며, 전원적이고 밝은 기운으로 가득한 명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악 6중주는 단 2곡으로 1번은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행복하고 큰 성과를 이루고 있을 시기의 작품이며 따라서 즐겁고 행복하며 젊고 정열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중 2악장은 진지하고 무거운 남자가 눈물을 흘리듯 굵고 묵직한 선율이 흘러나옵니다.
아울러 신성하고 색채가 풍부하며 음향적인 데다가 단순하고 민요풍의 선율이 풍성합니다.

브람스는 2악장을 피아노 3중주곡으로 편곡한 후, 클라라의 41번째 생일에 선물로 준 것으로 유명합니다.
슈만이 세상을 떠난 뒤 브람스에게 클라라는 사랑의 감정을 넘어 평생을 두고 좋은 스승이며, 친구이며, 조언자로써 남았습니다.
그런 젊은 시절의 사랑을 평생 가슴에 묻고 지낸 그이기에 브람스의 음악은 남자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음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브람스의 눈물'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듣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 2악장...

 

 

 

함께 감상해 보겠습니다.

 

 

[신동아 2012년 6월 호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신독일악파와 보수주의의 대립 (서양음악사 100장면, 2002. 7. 20., 박을미, 김용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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