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출생과 어린시절, 결혼 그리고 운명의 여인
[GN뉴스=경기도]이성아 기자=유튜브 뉴스
클래식으로 가는 여행, 해설이 있는 음악회 열네 번째 시간입니다.
이번 시간에 소개해 드릴 작곡가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1840~1893))입니다.
독일에 브람스가 있다면 러시아에는 차이콥스키가 있습니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비창> 등으로 잘 알려진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특징으로는 매우 서정적이고 섬세하며 귀에 쏙쏙 들어오는 단순한 멜로디입니다.
그는 클래식에 대한 무겁고 어렵다는 인식들 속에서도 단순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로 오늘날까지도 대중들에게 크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1840년 5월 7일, 러시아 우랄 지방의 보트킨스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일리야 페르토비치는 광산 감독관이었고 어머니 알렉산드라 안드레예브나는 프랑스계 러시아인으로 귀족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가정교사와 여러 명의 하인을 둘 만큼 유복한 가정에서 살았습니다.
집에는 오케스트리온(선율을 연주하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듯 화음이 만들어지는 악기)이 있을 만큼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님 덕에 차이콥스키는 4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그는 감수성이 풍부했고 소리에 유독 민감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몹시 예민한 아이였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크게 상처를 받고 혼나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음악이 아들을 더욱 예민한 성격으로 만들 거라는 생각에 그의 아버지는 더 이상 음악교육을 하지 않았고 이후 아들의 교육을 위해 프랑스 출신의 유모이자 가정교사 파니 뒤르 바흐를 고용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그녀를 무척 잘 따랐고 좋아했습니다. 훗날 그가 음악에 서방 문화의 요소가 많이 자리 잡은 데에는 그의 어머니와 파니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파니가 어린 차이콥스키를 두고 ‘유리로 만든 아이‘라고 말할 정도로 약간의 꾸중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겁도 많고 불안감에 시달리며 매우 불안정한 상태가 되곤 했습니다. 부모님과 파니 옆에서 만이 겨우 안정감을 찾곤 했는데 특히 어머니에 대한 애착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린 차이콥스키가 열한 살이 되던 해, 인격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친 사건을 겪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에 입학하면서 집을 떠나야 했는데 차이콥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족과 작별을 할 때에는 거의 발작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마차에 오르지 못하도록 거세게 움켜쥐며 붙잡는 그를 사람들이 억지로 떼어내자 분노에 차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며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이때의 상처는 차이콥스키의 내면을 지배하는 기억이 되었고 성인이 된 후에도 어머니를 떠나보내던 기억을 떠올리면 두려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상트페테르 법률학교는 예민하며 내성적이고 우울한 차이콥스키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통제가 심했기 때문에 그곳의 생활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그를 지탱해 주는 것은 음악이었고 학교 내에서 합창부 활동을 하며 음악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 그로부터 4년 뒤 그의 어머니는 콜레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차이콥스키는 어떤 이성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와의 사랑의 추억이 내면에 박제되면서 다른 이성에게 마음의 문을 열 수 없게 되고 어머니 이외의 여성을 숙명적으로 거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854년 차이콥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률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법무성에 임용되어 관리로 근무하였으나, 공직이 적성에 맞지 않았고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 1860년 안톤 루빈스타인이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하게 되었고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으로 개편한 이 교실의 제1기생이 되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우수한 성적으로 음악원을 졸업했고 이듬해에는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초빙이 되었습니다. 이 음악원은 안톤 루빈스타인의 동생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설립한 학원이었는데 평소 차이콥스키를 눈여겨보며 좋아했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교수직을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차이콥스키와 함께 살며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주었고 오랜만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던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화성과 작곡을 가르치고 작곡에 전념하며 많은 곡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37세가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실은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866년부터 1867년 무렵 우크라이나로 시집가 우크라이나 카멘카에서 살던 여동생의 집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자신이 그녀의 아들인 어린 외조카 블라디미르 다비도프를 보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차이콥스키는 바로 모스크바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외조카를 성적으로 사랑한 것에 대한 지나친 죄의식과 자괴감에 사로잡혀 한동안 칩거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그가 1877년 7월 모스크바 음악원의 제자이며 10살 연하의 음대생 안토니나 이바노프 밀류코바와 결혼하게 됩니다. 안토니나는 집요하고 끈질기게 구애를 하였는데, 차이콥스키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런 그에게 안토니나는 자신과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이러한 고백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내성적이고 우유부단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청혼을 거절하지 못하고 안토니나와 집요한 청혼에 마지못해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지만 결혼생활은 오래갈 수 없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안토니나와의 잠자리를 기피하였습니다. 그는 불완전한 결혼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또한 참으려는 노력도 부족했습니다.
결혼을 몹시 후회하여 자살을 결심한 그는 모스크바 강에 몸을 던지기도 하였으나 실패로 끝나고 결국 결혼 후 9주 만에 파국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안토니나는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고 법률상 부부관계만 지속될 뿐이었습니다.
결혼 직후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동생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녀를 목졸라 죽이고 싶다, 혐오스러운 인간, 파충류 같은 것 등 아내를 향한 증오에 찬 표현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안토니나는 3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아버지는 각각 달랐으며 아이들은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그녀는 차이콥스키보다 24년을 더 살았지만 행복하지 못했고 정신병에 걸려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차이콥스키는 안토니나를 떠나 그녀가 없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으로 요양을 할 겸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여행을 마무리하고 다시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돌아온 직후인 1876년, 행운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주선으로 폰 메크 부인을 소개받게 되는데 그녀는 러시아 철도 사업가이자 백만장자의 미망인이었습니다.
남편의 죽음으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그녀는 차이콥스키보다 9살 연상이었는데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매우 좋아한 그녀는 그의 후원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폰 메크 부인은 후원자가 되는 대신 지켜야 할 조건을 한 가지 내세웠는데 ’절대로 만나지 않겠다‘는 조건이었고 경제적인 후원만 하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자칫 남녀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미묘한 관계 유지를 위해 그녀가 생각한 최선의 조치였을 것이고 동성애 성향의 차이콥스키에겐 최고의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차이콥스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14년간 많은 후원금을 받았고 만나지 않는 대신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편지의 수는 무려 1,200여 통이나 되며 편지 내용은 음악에 대한 의견과 매우 사적인 감정 표현까지 쓰여 있어 훗날 차이콥스키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무려 14년 동안 계속된 그들의 관계는 매우 특이했습니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가 편하게 작곡을 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하였는데 자기의 별장을 빌려 주기도 하였고 해외여행을 가면 경비를 전부 대주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로 차이콥스키가 피렌체에 머물면서 작곡 활동을 할 때 폰 메크 부인도 때마침 그곳에 머물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게 되어도 말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하고 지나쳤으며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차이콥스키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폰 메크 부인이 후원을 중단하겠다고 한 것이었는데 그녀의 일방적인 통보였습니다.
그녀는 ’파산했어요 더 이상 당신을 후원할 수 없게 됐어요 부디 저를 잊지 마세요’라고 통보했습니다.
느닷없는 절교 선언에 차이콥스키는 충격을 받았고 배신감마저 들었습니다.
불과 일주일 전에도 평소처럼 애정을 담은 편지를 보냈고 이별의 전조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갑자기 차이콥스키와 결별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설 중 하나는 폰 메크의 장성한 자녀들이 차이콥스키에게 14년째 거액을 후원하는 데에 대한 불만과 러시아 사교계에 그들이 단골 가십거리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치심을 느낀 자녀들의 거듭된 요구에 폰 메크 부인은 재정난을 핑계로 후원을 중단하고 절교를 하듯 그를 떠났다는 것입니다.사랑인 듯 우정인 듯 기묘한 이들의 관계는 음악사의 흥미로운 미스터리 중 하나라고 합니다
다만 이들의 서로를 향한 감정은 온도차가 있는데 차이콥스키는 자신이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성향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그가 부인을 이성으로 사랑하는 것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냈지만 폰 메크 부인의 경우는 자신의 감정을 상당히 억누르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녀가 차이콥스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응급실에 들어가 당신이 보낸 소중한 편지봉투를 뜯으러 탁자로 달려갈 때면 하늘의 향기를 맡는듯한 기분이 된답니다. 당신을 향한 제 사랑은 운명과 같아서 저는 그것에 저항하지 못합니다‘라고 적혀있으며 또 그녀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차이콥스키 옆에 여자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다라고도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폰 메크 부인은 변태성욕자였던 남편에게 시달려 불감증이었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플라토닉 한 랑에 가까운 우정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차이콥스키의 작품에 관한 이야기와 그의 미스터리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번 시간에 소개해 드릴 차이콥스키의 작품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 왈츠(Sleeping Beauty Waltz Op.66a no.5)와 현을 위한 세레나데 2악장과 4악장 Serenade for Strings in C Major Op.48 No.2, No.4 Finale ‘Waltz’)입니다.
Sleeping Beauty Waltz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시나리오를 구성한 마린스키 극장의 감독 이반 브셰볼로츠스키의 의뢰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스토리는 프랑스 동화 작가 샤를르 페로의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기반을 두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차이콥스키의 첫 번째 발레곡인 백조의 호수에 대한 혹평 이후 오랜 시간 발레 작품과 담을 쌓고 지내던 차이콥스키가 다시 작품을 작곡하게 되면서 완성된 이 작품은 백조의 호수처럼 혹평을 받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큰 호평을 받은 작품도 아니라고 합니다.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으로 전 곡 5곡 중 마지막 제5곡은 가장 길고 화려한 왈츠인데 이 곡만 독립해서 상연되는 기회가 많다고 합니다.
줄거리 내용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내용 그대로이고 잠들어있는 공주에게 입맞춤한 후 오랜 잠에서 깨어난 공주와 왕자는 약혼식을 하고 얼마 후 화려한 결혼식이 전개되면서 막을 내리는 내용입니다.
이 곡은 오늘날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곡으로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제5곡 왈츠 알레그로
서주부에서는 금관악기와 현악기들의 화려한 멜로디가 돋보이며 나선형으로 상승하는 분위기 뒤에 안정적으로 왈츠가 진행되고 서주가 끝나면 큰 물결이 흔들리듯 멜로디가 전개되다 힘차게 끝을 맺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곡은 현을 위한 세레나데 2악장과 4악장 Serenade for Strings in C Major Op.48 No.2, No.4 Finale ‘Waltz’입니다.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는
서정적이고 우아한 선율이 담긴 전형적인 세레나데 곡으로 차이콥스키의 은인이자 모스크바 음악원 장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도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성격상 음악에는 항상 깊은 애수와 어두운 면이 감돌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진중한 선율과 깊고 서정적인 분위기는 그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2악장 Waltz: Moderato, tempo di valse 우아한 백조처럼 왈츠를 추는 발레리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발레보다 더 역동적인 리듬과 아름다운 왈츠풍의 리듬이 감미롭고 흥겨운 작품입니다.
제4악장 Finale(Tema russo): Andante - Allegro con spirito 두 개의 민요 선율이 주제를 이루고 있고, 첫 악장에서 들려주었던 주제를 마지막 악장의 두 번째 주제로 사용함으로써 전체적인 통일성을 강조하는 한편, 장대하면서도 우아한 코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비탄에 잠겼지만 이내 환희와 희열을 맛보는 듯한 화려한 음색으로 발전하며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4월 30일 가평 음악 역 1939에서는 지아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해설이 있는 음악회 ‘봄의 세레나데’ 콘서트가 진행됩니다.
해설이 곁들여진 이번 콘서트는 어렵고 무겁다 인식의 클래식 음악을 재미있는 해설과 함께 국내 정상의 실력을 갖춘 연주자들로 구성된 지아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봄을 한껏 느낄 수 있는 클래식 곡들과 오늘 소개해 드린 곡들을 연주하게 됩니다.
이번 콘서트에는 유튜브 채널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있는 성악가 박효주 님과, 아코디엠의 멤버로 아코디어니스트 이자원 씨와 그리고 기타리스트 조평재 님의 협연으로 더욱 아름답고 풍성한 무대가 만들어집니다.
이 아름다운 작품들을 귀에 쏙쏙 들어오는 해설과 함께 직접 감상하실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이니 많이 오셔서 멋진 클래식 콘서트의 감동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봄이 오락가락 변덕스러운 날씨로 아쉽게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동안 감기로 녹음이 어려워 영상 제작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이해 부탁드리고 여러분들도 변덕스러운 날씨에 건강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참고 : 의사신문(http://www.doctorstimes.com), 스토리클래식(오수현 지음), 차근차근 클래식(한혜란 지음)